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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까지 산 A급 전범 스즈키 데이이치

누사두아 2025. 4. 2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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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까지 산 A급 전범 스즈키 데이이치

스즈키 데이이치

 

100세의 A급 전범 스즈키 데이이치

일본 현대사에는 수많은 인물이 명멸했지만, 스즈키 데이이치(鈴木 貞一, 1888-1989)만큼 극적인 삶의 궤적을 그린 인물도 드뭅니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의 근대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부침, 쇼와 시대의 군국주의와 전쟁, 패전과 부흥, 그리고 경제 대국의 정점을 지나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된 후인 1989년,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긴 생애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스즈키 데이이치는 단순히 육군 중장이라는 고위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 태평양 전쟁 발발 전후의 결정적인 시기에 일본의 정치 및 경제 계획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와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국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企画院総裁)를 역임하며 전시 경제 동원 체제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는 도쿄 재판 피고인 중 유일하게 헤이세이 시대까지 생존한 인물로 , 그의 삶은 일본 근현대사의 격동을 온몸으로 겪어낸 증언과도 같습니다. 오늘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스즈키 데이이치의 생애와 경력, 특히 총력전을 위한 일본 경제 동원에서의 핵심적 역할, 그리고 도쿄 재판에서의 판결을 중심으로 일본 전시 국가 체제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던 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치바 농촌 소년에서 제국 육군 장교로

스즈키 데이이치는 1888년 12월, 지바현 산부군 시바야마정의 대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만주 산림 개발에 뜻을 두고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진학을 준비했으나,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합격하고 당시 육군 기병 대령이었던 인물의 권유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군사적 권력을 지향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는 1910년 육군사관학교(22기)를 졸업하고, 1917년 엘리트 장교 양성 기관인 육군대학교(29기)를 졸업했습니다. 육군대학에서는 영어와 중국어를 전공했으며 , 졸업 후 그의 경력은 보병 부대 근무 에서 빠르게 중국 관련 정보 및 정책 분야로 옮겨갑니다. 참모본부 지나반(支那班)과 작전과에서 근무하고 상하이, 베이징, 우한 등지에 주재하며 중국 문제 전문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러한 초기 경력은 훗날 그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의 군 경력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군인을 넘어, 일찍부터 정책 형성과 정치적 활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젊은 장교들과 함께 '목요회(木曜会)'를 조직했으며 , 나가타 데쓰잔,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이시와라 간지 등 군의 현대화와 정치적 영향력 확대, 그리고 종종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주장했던 핵심 인물들이 모인 '일석회(一夕会)'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맥은 그의 군 내부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931년 미수에 그친 3월 사건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으며 , 같은 해 만주사변 발발 시에는 군무국 근무와 동시에 만몽반(満蒙班) 대표로서 만주 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때 외무성의 시라토리 도시오나 중의원 의원 모리 가쿠 등과 연계하여 국제연맹 탈퇴를 강력히 주장하며 군부 내 강경파로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33년에는 육군성 신문반장(新聞班長)에 임명되어 정보 통제와 여론 형성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의 경력은 전통적인 야전 지휘관보다는 전략 기획, 정보 수집, 정치적 책략, 특히 중국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고위 정책 결정자로서 완벽하게 자리매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양복 입은 군인': 전시 경제를 지휘하다

스즈키의 경력은 점차 군사 분야를 넘어 국가 정책의 핵심으로 이동합니다. 1935년 내각조사국 조사관 , 1938년 고아인(興亜院) 정무부장 , 1940년 고아인 총무장관 서리 등 전시 체제 이행과 팽창하는 제국의 정책 수립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의 경력 정점은 1941년 4월,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국무대신 겸 기획원 총재로 임명된 것입니다. 그는 진주만 공격 직전의 긴박한 시기부터 전쟁 기간 동안 이 중요한 직책을 유지하며 제2, 3차 고노에 내각과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전시 경제 정책을 총괄했습니다. 기획원은 국가 물자동원계획(物資動員計画)을 수립하고 감독하는 기관으로 , 스즈키는 일본의 모든 자원(원자재, 산업 생산 능력, 노동력)을 전쟁 수행을 위해 배분하는 최고 책임자였습니다. 군인 출신이 민간 경제 계획을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양복 입은 군인(背広を着た軍人)'이라는 별명은 그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석유 수요와 국내 생산량 사이의 엄청난 격차와 같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 인조 석유 개발이나 흙으로 용광로를 만들어 선철을 생산하는 등의 필사적인 방안까지 고려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경제 계획을 넘어 전쟁 결정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1941년 10월 12일, 고노에 총리 사저에서 열린 5상 회의에 참석하여 미국 및 영국과의 개전 여부를 논의했는데, 이 자리에서 육군(도조)은 중국 철수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는 그가 순수 경제 문제를 넘어 핵심적인 전략 결정에도 참여했음을 보여줍니다.  

 

스즈키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외무성의 아시아 관련 권한을 사실상 육군으로 이관시키기 위해 영국의 인도 식민성을 모방한 대동아성(大東亜省) 설립을 추진했지만, 자신이 장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복잡했는데, 초기에는 황도파와 통제파 양측과 모두 가까웠고 1936년 2.26 사건 당시 청년 장교들에게 동정적이었으나, 사건 이후 교묘하게 주류인 통제파로 옮겨가 결국 도조 히데키의 측근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황도파에 가까웠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사건 이후 불우한 처지에 놓인 것과 대조적으로, 스즈키를 군 내부에서 보기 드문 기회주의자로 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생존술과 적응력은 그가 도조 내각 하에서 전시 경제 계획의 정점에 오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획원이 폐지된 후인 1943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이후 내각 고문, 1944년 산업보국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전쟁 말기까지 경제 통제에 관여했습니다. 기획원 총재로서 스즈키의 역할은 군부가 국가 경제를 직접 통제하며 전쟁 수행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활동은 도조 히데키 등이 주도한 대규모 장기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 동력이었으며, 이는 그를 전쟁 수행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제국 대신

 

도쿄 재판정에서: A급 전범으로 단죄되다

일본의 패전 후, 스즈키 데이이치는 연합국에 의해 A급 전범 용의자로 지명되었습니다. A급 전범 지명은 주로 '평화에 대한 죄', 즉 침략 전쟁이나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행한 지도자급 인물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27명의 일본 지도자들과 함께 기소되었습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IMTFE, 통칭 도쿄 재판)은 연합국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 일본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를 심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재판관은 11개 연합국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검찰단 역시 국제적이었습니다. 재판은 1946년 5월, 도쿄 이치가야의 구 육군성 건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소 내용은 크게 A급(평화에 대한 죄), B급(통상적 전쟁 범죄), C급(인도에 대한 죄)으로 나뉘었으며 , 스즈키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일본인 및 미국인 변호인단의 변호를 받았습니다. 1948년 11월 내려진 판결에서 스즈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 금고형(終身禁固刑)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는 도조 히데키, 이타가키 세이시로, 마쓰이 이와네, 히로타 고키 등 7명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나 다른 피고인들의 단기형, 혹은 재판 중 사망이나 면소 판결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스즈키에게 사형이 아닌 종신형이 선고된 것은, 재판부가 그의 주요 책임을 전쟁터에서의 직접적인 잔학 행위 지휘보다는 경제 동원을 통해 침략 전쟁을 계획하고 가능하게 만든 '평화에 대한 죄'로 판단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유죄 판결은 전쟁 수행에 있어 경제적 기획과 동원이 핵심적인 범죄 구성 요소로 간주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다음 표는 도쿄 재판에서 주요 A급 피고인들의 역할과 형량을 비교하여 보여줍니다.

도쿄재판

 

도쿄 재판 주요 A급 피고인 판결 비교

피고인 주요 역할 판결
도조 히데키 총리대신, 육군대신, 육군대장 사형
히로타 고키 총리대신, 외무대신 사형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신, 육군대장 사형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 난징 대학살 당시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사형
스즈키 데이이치 기획원 총재, 육군중장 종신 금고형
기도 고이치 내대신 종신 금고형
호시노 나오키 내각서기관장, 만주국 관리 종신 금고형
아라키 사다오 육군대신, 육군대장 종신 금고형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 금고 7년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금고 20년
오카 다카즈미 해군차관, 해군중장 종신 금고형
오시마 히로시 주독일 대사, 육군중장 종신 금고형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 재판 중 병사
나가노 오사미 해군대신, 해군대장 재판 중 병사
오카와 슈메이 국가주의 사상가 소추 면제(정신이상)

 

 

스가모 형무소 이후: 마지막 수십 년

스즈키는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5년 9월 또는 1956년 에 가석방되었습니다 (자료 간 석방 연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전범 문제가 정치적으로 다루어지던 1950년대 전반적인 상황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1958년경에는 수감 중이던 전범 대부분이 사실상 석방되었습니다.  

스가모 형무소

 

석방 후 스즈키는 고향인 지바현으로 돌아가 공직을 맡지 않고 조용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비록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비준 등 시사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 이는 공적인 활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관심의 표명으로 보입니다. 전전 및 전시의 막강했던 영향력과는 대조적으로, 석방 후 그의 삶은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졌습니다. 이러한 공적인 침묵은 개인적인 선택일 수도, 혹은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정치적 제약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전시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회고나 변론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석방 후 30년 이상을 더 살다가 1989년 7월 15일, 10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도쿄 재판의 A급 피고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습니다.  

 

 

결론: 전쟁 경제 설계자의 유산

스즈키 데이이치의 삶은 제국 육군 장교에서 출발하여 전시 일본의 경제를 총괄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가, 결국 A급 전범으로 단죄되는 극적인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유죄 판결은 전쟁을 계획하고 경제 동원을 통해 이를 지속시킨 행위가 국제 재판에서 중대한 '평화에 대한 죄'로 인정되었음을 명확히 합니다.

그에 대한 기회주의자적 평가 나, '양복 입은 군인' 으로 상징되는 군부-관료 엘리트가 전시 국가 체제에서 행사했던 막강한 권력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의 거리를 남깁니다. 스즈키의 100년에 걸친 생애는 그 자체로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증언이며, 전쟁의 참혹한 결과와 당시 일본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복잡한 유산을 상기시킵니다. 그의 이야기는 군사적 야망과 관료적 권력이 결합하여 일본의 팽창을 이끌고 결국 파멸과 도쿄에서의 심판으로 귀결된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록 그가 사망한 지 오래되었지만,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문제 는 스즈키와 같은 인물들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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