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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역사소설/풍운의 시대, 새로운 하늘 아래

풍운의 시대, 새로운 하늘 아래 1장

by 누사두아 2025.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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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의 시대, 새로운 하늘 아래

 

제1장: 용(龍)의 눈빛, 칼날 위에 서다

1245년 여름, 강화(江華).

바람이 거셌다. 소금기를 머금은 강화의 해풍이 연무대(練武臺)의 깃발을 찢어버릴 듯 흔들었다.

 

"흐읍!" "하!"

 

수백의 사내들이 토해내는 기합이 바람 소리를 갈랐다. 그들은 고려 최정예 부대이자, 무신정권의 심장인 삼별초(三別抄)의 군사들이었다. 맨몸으로 짝을 이뤄 서로를 내던지고, 묵직한 목검을 맹렬하게 부딪치는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단순히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실전(實戰). 언제든 몽고의 잡배들 목을 벨 수 있는 날카로운 살기(殺氣)가 훈련장 가득 넘실거렸다.

그 아수라장 같은 훈련장을, 한 사내가 산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그러나 구부정한 기색 하나 없이 꼿꼿한 허리와 떡 벌어진 어깨는 젊은 장수들조차 압도했다. 화려한 비단 갑옷 위로 진홍색 전포(戰袍)를 걸친 그의 허리춤에는 용 무늬가 새겨진 환두대도(環頭大刀)가 위엄을 뽐냈다.

고려의 실질적인 군주,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최우(崔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연병장을 훑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그 어떤 호령보다도 무거웠다. 훈련에 임하는 병사들은 그의 시선을 등 뒤에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져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쥐어짰다. 그의 곁에 선 심복 장군 이공주(李公柱)조차 감히 숨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고 땀을 훔쳤다.

 

"제법이구나."

한참 만에 최우의 입이 열렸다. 목소리는 늙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강철을 울리는 듯 쩌렁쩌렁했다.

 

"저놈들이야말로 몽고 놈들의 예봉을 꺾을 고려의 칼날이다. 내가 평생을 바쳐 벼려낸 검이지."

 

"공(公)의 위엄 아래, 어찌 정병(精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공주의 아첨 섞인 말에 최우는 대답 대신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연병장을 넘어, 안개 자욱한 바다 건너편, 몽고군이 활보하는 옛 강토를 향해 있었다.

스스로가 대견했다.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몽고라는 전대미문의 적을 맞아 이 섬으로 모든 것을 옮겨 항전의 기치를 든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겼던 강화 천도. 이 섬을 거대한 요새로 만들고, 팔만대장경을 새겨 부처의 힘까지 빌려가며 나라의 명맥을 지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이룬 성과였다.

그러나 시간은 속일 수 없었다. 밤마다 기침이 잦아지고, 한 번씩 찾아오는 현기증은 그가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일깨웠다. 자신이라는 거대한 태산이 무너지면, 이 모든 것은 누가 지켜낼 것인가.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최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후계. 그것이 지금 그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화두였다.

머릿속에 두 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나는 자신의 피를 이었으나 그 출신이 비천한 아들, 최항(崔沆). 승려로 살던 것을 얼마 전 환속시켰다. 영민하고 독기가 서려 있어 칼처럼 쓸모가 있겠으나, 그 칼날이 언젠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섬뜩함이 느껴졌다. 권력에 대한 탐욕이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 전주 김씨(全州 金氏) 가문의 수재이자, 가장 사랑하는 딸의 남편인 부마(駙馬) 김약선(金若先). 성품이 대쪽 같고 학식이 깊어 문신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무장들의 세상에 문신의 기품을 더해 정권을 안정시킬 그릇이라 여겼다. 하지만… 저 피비린내 나는 연병장을 보라. 과연 저 선비가 이 늑대와 이리떼 같은 무인들을 호령하고, 잔혹한 몽고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까.

'약선은 너무 맑다. 허나 그 맑음이 이 혼탁한 세상을 정화할 수도 있겠지. 항은 너무 강하다. 허나 그 강함이 모든 것을 부러뜨릴 수도 있을 터.'

최우는 긴 상념 끝에 결심을 굳혔다. 이제는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일 때가 되었다.

 

"공주야." "예, 공!" "연무는 그만두게 하라. 그리고… 부마를 내 처소로 들라 해라."

 

순간 이공주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최항이 아닌, 김약선이었다.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흐름이 방향을 트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같은 시각, 김약선은 자신의 서재에서 붓을 들고 있었다.

최우의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의 집은 삼엄한 군사들의 기척 대신, 고요한 묵향(墨香)과 책 내음으로 가득했다. 그는 병법서나 실록이 아닌, 맹자(孟子)를 펼쳐놓고 그 구절을 화선지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옮겨 적고 있었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작은 덕이 큰 덕을 섬기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작은 힘이 큰 힘을 섬긴다 (天下有道 小德役大德, 天下無道 小力役大力).’

지금 고려는 도(道)가 없는 세상인가. 그래서 저 북쪽의 거대한 힘, 몽고를 섬겨야 하는가. 아니면 장인 최우의 힘이 곧 고려의 도인가. 김약선의 미간에 깊은 고뇌가 서렸다. 그는 문신이었다. 힘이 아닌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발 딛고 선 현실은 칼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무신정권의 시대였다.

 

"서방님, 또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아내 최씨 부인이 조용히 서재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갓 우려낸 차가 들려 있었다.

 

"부인이야말로 안색이 어둡구려. 혹 아버님께 무슨 일이 있으신가?"

 

김약선의 물음에 최씨 부인은 차를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어제 그 사람이 아버님을 독대했다 들었습니다. 서산 별채에서요."

 

김약선의 붓끝이 순간 멈칫했다. '그 사람', 최항. 아내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는… 그저 아들로서 아버지를 뵌 것이겠지."

김약선이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최씨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서방님. 그 자의 눈을 보셨습니까? 굶주린 늑대의 눈입니다. 아버님의 권력, 그리고… 서방님께서 가진 모든 것을 탐하고 있습니다. 부디 경계하십시오. 도방의 무인들 중 상당수가 벌써 그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아내는 누구보다 정권의 생리를 잘 알았다. 김약선은 그런 아내가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그는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걱정 마오, 부인. 나는 내 자리에서 소임을 다할 뿐이오. 장인어른께서 나를 부마로 삼으신 뜻을 나는 잊지 않았소."

 

그때였다.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진양부원군 댁에서 교지(敎旨)를 가지고 왔습니다!"

 

최우의 명을 전하는 사자였다. 김약선과 최씨 부인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올 것이 왔다는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김약선은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가 다가와 흐트러진 곳 없는 그의 관복 매무새를 다시 한번 매만져 주었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내의 불안한 눈빛을 뒤로하고 김약선은 밖으로 나섰다. 최우의 사자는 그를 보자마자 허리를 깊이 숙였다.

 

"부마 김약선께 전합니다. 공께서 지금 즉시 처소로 들라 명하셨습니다."

 

김약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개는 걷혔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최우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 이제 그는 선비의 서재를 떠나, 용의 굴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피할 수 없는 그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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