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서 총리로 총리에서 왕으로 캄보디아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자 독재자였으며 실권없는 왕까지 되었던
노로돔 시하누크
어린 시절과 왕위 계승 (1922-1955):
노로돔 시하누크는 1922년 10월 31일 캄보디아의 왕실에 태어났다. 그의 초기 교육은 사이공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에는 예술에 흥미를 키운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렸던 인물이지만 프랑스의 영향으로 1941년 18세의 나이에 프놈펜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캄보디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받았으며 시하누크는 나라의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정치적 참여와 퇴위 (1955-1970):
1955년, 시하누크는 특전적인 정치 참여를 위해 왕위를 퇴위하기로 결정했다. 상쿰 레스트르 니옴 (Sangkum Reastr Niyum) 정치 운동을 창설하여 총리 및 나중에는 국가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시하누크의 정치 철학은 특히 인도차이나 전쟁의 동요한 시기에 캄보디아의 중립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은 이 기간 동안 정치적 반대를 억제하고 국내에서 민주적 자유를 제한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론 놀 쿠데타와 유배 (1970-1981):
1970년, 시하누크가 외국에 머물러 있을 때 론 놀에 의한 쿠데타가 그를 권력에서 몰아냈다. 신정부는 미국과 동맹하여 베트남 전쟁에 휘말렸다. 시하누크는 이에 대응하여 처음에 중국, 그 후에는 북한에서 피난을 찾았다.
유배 기간 동안 시하누크의 정치적 입장은 큰 변화를 겪었다. 놀랍게도 그는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당 반란군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시하누크 정치 경력에서 복잡한 시기를 나타내며 캄보디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와의 동맹 및 암흑의 해 (1975-1979):
시하누크의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루즈와의 동맹은 국가 역사에서 어두운 장면으로 남았다. 1975년 캄보디아 크메르루즈가 국가를 지배하면서 그는 그 시기 동안 상징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동맹은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고통받고 강제노동, 기근 등을 통해 약 170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국제 공동체가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가한 잔인한 행위를 인식하자,
시하누크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아 동맹에서 멀어졌다.
유배와 캄보디아 복귀 (1981-1993):
1979년 베트남의 침공에 따라 캄보디아 크메르루즈가 몰아나자, 시하누크는 주로 중국과 북한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 이후의 몇 년은 캄보디아에서의 정치적 동요로 특징지어졌다. 1991년 파리 평화 협정의 서명으로 지역에 안정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자, 시하누크는 1991년에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왕위 복귀, 퇴위 및 유산 (1993-2012):
1993년 캄보디아가 헌법적인 군주국으로 전환되면서 시하누크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러나 2004년 건강 이유를 들어 그는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양도했다. 그 후 시하누크는 베이징에서 2012년 10월 15일 새벽에 사망했다.
노로돔 시하누크의 생애는, 초기 독립과 중립을 향한 노력뿐만 아니라 후기에는 캄보디아 역사의 어두운 장면 중 하나인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와 함께 기억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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