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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남미

"남미의 나치"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by 누사두아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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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나치라고 불릴 정도로 최악의 정치를 했으며 남미 최악의 독재자로 불리우는 아르헨티나의 41대 대통령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

 

어린 시절과 군사 경력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돈도는 1925년 8월 2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군인 집안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르헨티나 군대에 입대했다. 비델라의 군 생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유능하고 훈련된 장교로 명성을 얻으며 계급을 상승시켰다.

 비델라의 군대 계급 내에서의 꾸준한 상승은  군대 내에서 다양한 지휘관직을 맡으며 군대 내 위계질서 내에서 경험과 영향력을 쌓게 되며 이후 쿠데타를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권력의 부상

혼란스러운 197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사회적 격변에 휩싸여 있었으며, 비델라의 권력 부상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1976년에 그는 이사벨 페론 정부를 전복시키는 군사 쿠데타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군사 총독으로서 자리를 굳혔고 1976년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978년 대통령 시절의 비델라

 

그가 집권기간동안 벌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더러운 전쟁: 비델라 정권은 극좌 게릴라, 정치적 반대세력 및 체제에 위협으로 인식된 사람들을 상대로 알려진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잔인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군사, 경찰 및 정보 기관을 포함한 안전 당국에 의해 납치되었으며, 고문을 받고 강제로 실종되었다.
  2. 강제 실종: 강제 실종은 비델라 대통령 시기의 특징이 되었다. 피해자들은 종종 집, 직장 또는 길거리에서 법적 절차 없이 가져갔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이 그들의 가족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영원히 사라졌다.
  3. 비밀 구금소: 정권은 고문 및 실종자들의 심문이 이루어지는 비밀 구금소를 설립했다. 이러한 구금소는 정보 획득, 반대 억제 및 인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유명한 구금소 중에는 ESMA(해군 기계 학교)와 Campo de Mayo가 있었다.
  4. 검열과 언론 제한: 비델라 정부는 반대 음성을 억압하기 위해 언론을 엄격하게 검열하고 통제했다. 신문, 라디오 방송 및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검열되었으며, 언론인들은 그들의 보도로 인해 대상이 되었다.
  5. 시민 자유의 정지: 비델라의 지배하에는 시민 자유와 정치적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정당은 금지되었으며, 노동 조합은 억압되었으며, 공개 시위는 안전 당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6. 경제 정책: 비델라 정부는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 중에는 규제 완화, 민영화 및 삭감 조치가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근로자 계급과 마이너리티 커뮤니티에 불균형하게 영향을 미쳤다.
  7. 국제적 고립: 인권 유린 행위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국제적으로 점점 고립되었으며, 비난을 받았다. 많은 국가와 국제 기구가 정권의 행동을 비난하고 아르헨티나에 제재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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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지배와 반대

비델라의 재임은 검열, 언론 제한 및 반대 억제 등으로 특징 지어졌다. 국제적 비난과 국내 반대가 증가하더라도 그는 권력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굳건하게 머물렀다.

그의 통치시기 대통령은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모두를 가지고 있었으며 수많은 반대파를 숙청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판 받는 비델라

 

 

처벌과 유산

1983년에 민주적 선거가 아르헨티나에서 열리자, 아르헨티나는 비델라를 재판에 넘겼다.

 비델라는 그의 대통령 시기에 저지른 인권 유린 행위로 기소되었다.

3번의 재판에 걸쳐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85년에는 그는 인류에 대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평생 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2013년 5월 17일에 복역 중에 변기에 앉은 채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으며, 폭력, 억압 및 처벌의 기억과 함께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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