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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범죄자

해적왕 새뮤얼 "블랙 샘" 베라미

by 누사두아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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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2월 23일 영국 데번에서 태어나 1717년 4월 26일에 사망한 해적으로, 그는 기록된 역사상 가장 부유한 해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적의 황금시대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로 1억 2000만 달러가 넘는 재물을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새뮤얼 "블랙 샘" 베라미

 

새뮤얼 "블랙 샘" 베라미



초기 생애 

 

베라미는 데번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해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십대 후반에 영국 왕립 해군에 합류하여 여러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1715년경 케이프 코드로 여행을 떠나, 이후 플로리다 해안으로 이동하여 침몰한 보물 함대를 찾으려 했습니다.

 

 베라미는 처음에는 벤자민 호니골드의 지휘 아래에서 해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호니골드가 영국 배만 공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을 때, 베라미는 그와 의견이 달랐고, 결국 호니골드와 티치가 지휘권을 잃은 후 자신의 배를 탈취하여 독립적인 해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베라미의 해적기



해적행위

새뮤얼 "블랙 샘" 베라미는 해적의 황금시대 동안 가장 유명한 해적 중 한 명으로, 그의 해적행위는 1716년부터 1717년까지 약 1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최소 53척의 배를 점령했으며, 이는 그를 역사상 가장 부유한 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위다호의 점령

베라미의 해적 경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717년 봄에 최첨단 노예 무역선인 위다호를 점령한 것입니다. 이 배는 당시 가장 크고 강력한 해적선 중 하나였으며, 그가 점령한 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합니다.

해적행위의 특징 

그의 해적행위는 그의 관대함과 자비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포로들에게 상냥하게 대했으며, 때로는 포로들에게 배를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해적의 왕자"라는 별명을 안겨주었고, 그와 그의 승무원들은 자신들을 "로빈 후드의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해적행위의 종말 

그러나 그의 해적 생활은 1717년 4월 26일, 위다호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침몰하면서 비극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베라미와 그의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고, 이 사건은 그의 해적행위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위다호의 보물

위다호에서 발견된 보물은 해적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1984년 케이프 코드 해안에서 발견된 이 배는 1717년 폭풍으로 침몰한 후 260년 이상 잊혀져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 위다호는 약 3~15미터의 모래 아래에 묻혀 있었고, 수심 5~9미터의 바다 속에서 약 6.4킬로미터에 걸쳐 퍼져 있었습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연구팀은 200여 개의 유물을 회수했으며, 이 중에는 "the Whydah Gally 1716"이라고 새겨진 종과, 대포, 무기, 그리고 은화와 금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위다호가 골든 에이지 해적선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위다호는 50척 이상의 배에서 약탈한 보물을 싣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발견된 보물 중에는 수천 개의 금화와 은화뿐만 아니라, 보석, 의류, 무기류 등 개인적인 물품들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해적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위다호의 보물



베라미의 해적행위는 단기간이었지만, 그의 행적은 해적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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