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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범죄자

스티브 본넷: 바다의 신사 해적

by 누사두아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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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본넷: 바다의 신사 해적

 


18세기 초, 해적의 황금시대가 절정에 달했을 때, 많은 해적들이 카리브해와 대서양을 무대로 활약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티브 본넷은 특별한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는 "바다의 신사(Gentleman Pirate)"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독특한 배경을 가진 해적이었습니다. 오늘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스티브 본넷의 삶과 해적으로서의 활동,

그리고 그의 유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688~1718. 12. 10 스티드 본넷

 


초기 생애


스티드 본넷은 1688년 바베이도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영국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사망 후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상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1717년 봄 해적의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합니다1.

해적으로서의 경력
스티드 본넷 은 자신의 배, 리벤지호를 구입하고,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다른 배들을 포획하고 바베이도스의 배들을 불태우며 활동했습니다. 그는 나소로 항해를 떠났고, 해적들의 안식처로 알려진 "해적 공화국"에 도착했지만, 스페인 전함과의 조우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습니다. 나소에 도착한 후, 본넷은 악명 높은 해적 블랙비어드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선원들을 이끌 능력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블랙비어드에게 자신의 배의 지휘권을 넘겨줍니다.

캡틴 토마스로서의 새 출발
스티드 본넷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찰스에덴에 의해 사면을 받고, 스페인 선박에 대한 사설투자를 위한 허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적 활동을 재개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고, 자신의 배의 이름을 로얄 제임스호로 변경하고 "캡틴 토마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스티드 본넷의 최후의 전투


스티드 본넷의 최후의 전투는 1718년 9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케이프 피어 강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는 해적의 황금시대의 일부로, 윌리엄 렛 대령이 이끄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두 척의 슬룹과 본넷이 지휘하는 해적 함대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투의 배경
본넷은 그의 플래그십인 로열 제임스와 두 척의 무장한 슬룹, 프랜시스와 포춘을 지휘하며, 총 46명의 해적 승무원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로열 제임스는 수리가 필요했고, 허리케인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본넷은 케이프 피어 강의 하구를 신뢰할 수 있는 피난처로 선택했습니다.

전투의 진행
렛 대령은 9월 26일 저녁에 케이프 피어 강에 도착했고, 본넷의 배들을 발견했습니다. 본넷과 그의 승무원들은 렛의 슬룹을 상인선으로 착각하고 접근했지만, 렛의 슬룹이 헨리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해적들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본넷은 어둠 속에서 강을 따라 도망치기보다는 바다로 돌아가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적들은 두 슬룹을 지나가려고 준비했지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약 6시간 후에 본넷과 그의 남은 승무원들은 항복했습니다.

 

스티드 본넷의 졸리로저

처형과 최후


스티드 본넷의 처형은 1718년 12월 10일에 남부 캐롤라이나의 찰스타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케이프 피어 강 전투에서 체포된 후, 찰스타운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고, 윌리엄 렛(William Rhett)이 이끄는 함대에 의해 체포된 다른 해적들과 함께 기소되었습니다. 본넷은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그의 지지자들과 가족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에게 그의 형을 감형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결국 그의 형은 집행되었습니다.

 

 


본넷의 처형은 당시 해적에 대한 엄격한 법 집행의 일례로, 그의 죽음은 해적의 황금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그의 처형은 오늘날까지도 해적에 대한 이야기와 전설 속에서 회자되며, 그의 삶과 죽음은 해적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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