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지 앙그리아: 바다의 사자, 마라타 해군의 전설
18세기 인도의 바다는 유럽 상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코나지 앙그리아, 즉 칸호지 앙그레가 있었습니다. 그는 마라타 제국의 해군을 이끌며 유럽 선박들을 공격하고 잭칫(세금)을 징수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오늘날 그는 인도 해상 역사에서 가장 능숙한 해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초기생애와 해적활동
초기 생애
칸호지 앙그레는 1669년 마하라슈트라의 라트나기리 근처 수바르나두르그 요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투코지는 시바지 마하라즈의 지휘하에 수바르나두르그에서 200개의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은 당시 유럽 상인들, 여행자들, 그리고 작가들 사이에서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해적 활동
코나지 앙그리아는 마라타 해군의 사령관으로서, 유럽 상인선을 공격하고 그들의 승무원을 몸값으로 잡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선박들이 그의 공격의 희생양이 되곤 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영국은 그의 해적 활동을 종식시키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지만, 앙그레는 1729년 사망할 때까지 유럽 상인선을 계속 잡아들였습니다.
마라타 제국과의 관계
1713년, 샤후는 내륙 영토를 보호하고 앙그리아의 영향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페슈와, 바히루판트 핑글레가 이끄는 강력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앙그리아는 페슈와의 진격을 알고 빠르게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결정적으로 페슈와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는 전략적 요새인 로하가드와 칸달라 근처의 라즈마치를 점령하며 사타라로 진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발라지 비쉬와나트는 모든 가능한 군대를 동원하여 앙그리아의 위엄과 야망을 인정했습니다. 협상이 이루어졌고, 발라지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앙그리아가 페슈와를 석방하고, 삼바지와의 관계를 끊고, 샤후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라즈마치를 제외한 모든 정복지를 포기한다면, 그에게 10개의 요새와 16개의 요새화된 직책을 부여하고, 마라타 함대의 제독으로서 Vizarat Mal과 Sarkhel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최후와 유산
코나지 앙그리아, 즉 칸호지 앙그레는 1729년 7월 4일에 마하라슈트라의 알리바그에 있는 콜라바에서 사망했습니다.
코나지 앙그리아의 사망 후, 그의 자손들은 그의 해적 왕국을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아들들 중 숨바지와 만나지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해적 활동을 계속했으며, 1730년대에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숨바지는 대부분의 통제권을 행사했으며, 영국 해군의 증가하는 해상력과 무장 호위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숨바지의 이복동생인 툴라지는 1743년에 지휘권을 이어받아 공격을 강화했으며, 영국 동인도 회사의 호위 전함까지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현지 힌두 마라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성공적인 공격을 시작하여, 모든 해적 기지를 파괴했고, 마침내 1755년에 윌리엄 제임스 대령에 의해 세번드루그가 함락되었습니다. 툴라지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의 함대는 파괴되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은 봄베이로 보내졌습니다.
칸호지 앙그레와 그의 자손들은 거의 50년에 걸쳐 영국의 지배를 방해한 것으로 기억되며, 그들의 활동은 오늘날에도 국가적 애정을 가지고 기억되고 있습니다.
칸호지 앙그레의 해적 활동은 오늘날에도 인도 해상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략과 용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기념물과 함대에서 여전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앙그리아는 인도 해군의 자부심이자, 해상 전쟁의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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