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부터 2003년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라크 대통령을 역임하고 이라크의 정치가이자
독재자이자 전범 사담 후세인
어린 시절
사담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티크리트 인근의 알아와자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사망한 후 미망인인 어머니의 손에 자랐으며 가난과 한부모가정인 탓에 어린시절 힘들게 자랐다.
권력에 오르다
사담 후세인은 1950년대 후반 사회주의 정당이자 범아랍 정당인 바트당에 가입했다.
그는 쿠데타 시도와 당내 정치적 음모에 연루되었고, 1968년 바트당이 이라크의 권력을 장악했다. 사담은 쿠데타이후 일반 사무국의 수장 역할을 맡아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권력 공고화
바트당 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사담 후세인은 1968년 이라크 부통령에 취임한 후 1979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이라크 사회, 정치, 군대의 모든 측면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 통치의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년)이었습니다. 사담은 이란 혁명 이후 혼란을 틈타 이란을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으로 인해 양측 모두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라크의 자원이 고갈되었다.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나버렸고 양국의 엄청난 피해와 사망자만 남기게 되버린다.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
1990년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 침공과 합병을 명령했고, 이는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유엔의 지원을 받아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개시하여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고 이라크의 군사 인프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걸프전 이후 제재 및 사찰
걸프전 이후 이라크는 경제 제재와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해체하라는 국제적 압력에 직면했다.
사담 후세인은 유엔 무기 사찰에 저항하여 국제 사회와 주기적으로 대치했다.
2003년 침공과 생포
2003년 미국은 동맹국들과 함께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이라크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침공은 사담 후세인의 정권을 빠르게 무너뜨렸다.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미군에 의해 티크리트 근처의 굴에 숨어있다가 체포 된다.
재판과 처형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족 민간인에 대한 화학무기 사용과 정적 살해 등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이라크 법원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그는 2006년에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담 후세인은 2006년 12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담 후세인의 통치는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 일부 이라크인들은 그를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잔인한 독재자로 여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아랍 민족주의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정당하지 않은 전쟁을 통해 피해자들을 야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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