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괴링(1893-1946)은 나치 독일의 제국 원수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나치 정권 내에서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나치 정권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 중 행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나치독일의 2인자였다.
초기 생애와 군 경력
헤르만 빌헬름 괴링은 1893년 1월 12일 독일 로젠하임에서 태어났다. 그는 판사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어린시절를 보냈다. 그 후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괴링은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으며 전투 활동으로
독일 최고의 군사 영예인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는등 우수한 군사능력을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활동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괴링은 처음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우익 민족주의 단체와 준군사 단체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에 괴링을 히틀러를 만나게 되고 한번에 만남이후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어
초창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나치당의 고위 간부로 승급하게 되었고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얻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는 고위직들을 만나 기부를 요구하고 나치당으로 영입하면서 초기 나치당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나치 정권의 주요 역할
괴링은 나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게슈타포(비밀 경찰)와 SA(돌격대)를 창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히틀러의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법 집행 및 보안군에 대한 막강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고 이 일들은 나치정권이 사회를통제하고 정권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괴링은 유대인 재산과 기업의 아리안화 관련 정책을 시행하는 책임도 맡아 많은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역할
제2차 세계대전 중 괴링은 독일 공군 총사령관으로 독일 공군 전략을 책임졌다.
그의 군사적 능력을 뛰어나서 나치군 공군인 루프트바페가 뛰어난 전투능력을 보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영국 전투에서 공중 우위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후 심한 약물중독과 자만과 허세때문에 공군뿐만아니라 독일군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만들었고 나치독일이 패배하는데 영향을 크게 끼친다.
괴링은 홀로코스트 계획과 나치 점령지에서 예술품과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도 관여했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죽음
1945년 독일이 패전한 후 괴링은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전쟁 포로로 잡혔다.
그는 전쟁 범죄, 반인도 범죄 및 기타 범죄 혐의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을 받은 나치의 주요 전범이었다.
1946년 10월 1일, 헤르만 괴링은 교수형에 해당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써 총살이 아닌 것에 불만을 가졌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46년 10월 15일 밤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헤르만 괴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의 잔혹함과 반인륜적 범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의 생애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나치 정권에서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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