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요셉 괴벨스(1897-1945)는 히틀러의 최측근 으로 1933년부터 1945년 사망할 때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선전부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히틀러를 위하여 제3제국 시절 나치 선전과 여론 조작을 맡아 선전 선동의 제왕으로 불렸다.
어린 시절
괴벨스는 1897년 10월 29일 독일의 작은 마을 라이히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소아마비로 인한 수술로 한쪽 다리가 굽는 신체적 장애를 겪었고 그로인해 항상 좌절감과 열등감을 겪었다. 이후 평생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다고 한다.
학문적 추구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괴벨스는 지적이고 야심 찬 학생이었다.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한다. 192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에서는 박사 학위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초기 나치 참여
괴벨스는 1924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빠르게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나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기 위해 글과 말 모두에서 선전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선전 선동의 천재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나치당을 키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후 히틀러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쳤다.
선전부 장관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괴벨스는 선전 및 대중 계몽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이 직책을 통해 그는 나치 독일의 미디어, 문화, 커뮤니케이션의 상당 부분을 성공적으로 통제하였으며 특히 총력전 연설은 대단해서 독일사람들이 전쟁을 지지하게 하고 총력을 기울이게하는데 큰 작용을 했다.
매스 미디어 조작
괴벨스는 신문, 라디오 방송, 영화 및 기타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나치의 메시지를 형성하고 내러티브를 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전쟁에 인구를 동원하며 나치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기 위해 선전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괴벨스의 선동 기술은 뛰어나서
전쟁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되었다.
박해와 대량 학살에서의 역할
괴벨스는 유대인 박해를 비롯한 나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선전을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수백만 명의 유대인 및 기타 소수 집단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적극 관여했다.
몰락과 죽음
2차 세계대전이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이 베를린에 근접하자 괴벨스는 히틀러의 자살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1945년 5월 1일 히틀러의 벙커에서 여섯 자녀에게 독약을 먹이고 자살하였다.
폴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선전을 퍼뜨리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이 저지른 잔학 행위에 공모했다는 이유로 역사상 많은 논란과 비난을 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악명은 선전선동을 써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나치 독일의 이름과 함께 기억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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