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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남미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by 누사두아 2024.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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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해방자이자 실패한 대통령 그리고 영웅으로 남게 된  시몬 볼리바르

시몬 볼리바르

 

 

초기 연도 1783-1807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7월 2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부유한 크레올 가정에 태어났다. 그의 초기 교육은 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이루어졌으며 계몽주의적 이념과 혁명적인 움직임에 노출되었다. 1802년에는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즈 델 토로와 결혼했지만, 결혼 후 그녀가 질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에 직면했다.

 

 

중년 1808-1824

1808년 페닌술라 전쟁이 발발하면서, 볼리바르의 삶에는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 통제가 약해지면서 그는 독립에 대한 열망에 불타게 되어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 그의 전략적인 성공으로 인해 1819년 보야카 전투와 1821년 카라보보 전투와 같은 중요한 승리가 이뤄졌고, 이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안전하게 지켰다. 그는 또한 1819년에 그란 콜롬비아를 설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쟁시절 볼리바르

 

 

 

말년 1824-1830

그 후 볼리바르는 1824년까지 지속되는 페루 독립 전쟁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는 정치적인 어려움과 내부 갈등이 펼쳐졌다. 1826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리더십은 안정적이지 못했고 국가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1828년에는 그란 콜롬비아가 분열되고, 그 후로는 그의 정치적인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1830년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뒤, 볼리바르는 정치적 반대와 힘든 유배 생활을 맞이했다. 그의 꿈은 통일된 남미 대륙을 만드는 데 있었지만, 국가 간 갈등과 지역주의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통령 시절 볼리바르

 

사임이후 1830-1830

볼리바르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남미의 통일된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치적인 어려움과 건강 문제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결국은 1830년 12월 17일에 콜롬비아의 산타 마르타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몬 볼리바르의 노력과 희생은 남미 대륙에서의 독립의 원념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이름은 남미 곳곳에서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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