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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유럽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 티토

by 누사두아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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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침공을 게릴라전을 통해 막아낸 영웅에서 공산주의 독재자로 변모해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한 독재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

요시프 브로즈 티토 1892~1980

 

 

 

 

초기생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초기 생애는 크로아티아의 쿰로베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892년 5월 7일에 크로아트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07년에 금속공으로 견습을 시작하여 1910년에 훈련을 마쳤고, 같은 해에 자그레브에 있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의 사회민주당에 가입했습니다.

1913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징집되어 비전투 장교 훈련을 받고, 1914년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한 후 1915년 초 러시아 전선으로 전송되었습니다. 그는 1915년 4월에 러시아에 의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고, 장기간의 병원 치료 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볼셰비키 선전에 익숙해졌고, 이 경험이 그의 정치적 신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로시절 티토(왼)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다.

 

티토가 공산주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여러 복합적인 경험과 역사적 상황이 겹쳐진 결과였습니다. 그의 초기 경험 중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에 복무하면서 러시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볼셰비키 선전에 노출되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이어진 내전에 참여한 후, 1918년 발칸 반도로 돌아와 새롭게 설립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서 여러 리더십 포지션을 맡으며 조직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고, 1928년에는 혁명적 활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5년간의 징역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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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는 1939년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군의 지도자로서 독일 점령하의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인 저항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전쟁 후,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총리가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를 거부하는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독립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지지하며, 냉전 시대에 양대 적대 블록 사이의 비동맹 정책을 촉진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티토가 공산주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제2의 유고슬라비아’, 즉 1991년까지 지속된 사회주의 연방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도자시절 티토

 

그의 정책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할 때 독특한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사무총장(나중에 대통령)으로서 1939년부터 1980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국가를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고슬라비아 민족해방군의 지도자로서 활약했습니다.

티토의 통치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소비에트 모델을 따르지 않고 ‘자주적 사회주의’ 또는 '국가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각 지역의 자치를 인정하고, 다양한 민족 그룹들이 상호 협력하는 연방제를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또한, 티토는 냉전 시대에 양대 적대 블록 사이에서 비동맹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비동맹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유고슬라비아를 국제적으로 독립적인 위치에 두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유고슬라비아가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양쪽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두 강대국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습니다.

티토의 통치 아래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연방으로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유고슬라비아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91년까지 
지속된 '제2의 유고슬라비아’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말년과 최후

Josip Broz Tito의 말년은 그의 건강이 저하되기 시작하면서 특징지어졌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그의 건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고,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증가시켰습니다. 티토는 1980년 5월 4일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있는 대학 의료 센터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은 괴저로 인한 감염이었습니다.

 

티토의 무덤



티토의 사망은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끝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사망 후, 유고슬라비아는 상승하는 민족주의와 흔들리는 경제로 얽히기 시작했고 내전이 일어나 7개의 국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국가적인 애도의 시간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해 큰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티토는 베오그라드에 있는 꽃의 집(House of Flowers)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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