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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아프리카

700년 제국을 무너트린 독재자 멩기스투

by 누사두아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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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20세기 후반 에티오피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700년 역사의 에티오피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황제를 살해하며 수십만의 사람들을 숙청한 인물이다. 그의 집권한 1974년부터 1991년까지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알려져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초기생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1937년 5월 21일 에티오피아 왈라잇타에서 가난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써 폭행을 당했다고 알려져있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입대해 육군사관학교을 들어가 군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권력에 오르다

 

멩기스투는 1974년 6월 에티오피아 군대의 동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를 무너뜨리고 수세기 동안 이어진 솔로몬 왕조의 통치를 종식시키면서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는 황제의 독재 통치에 대한 불만과 전국에 만연한 기근이 원인이었다



검은토요일

 

멩기스투는 쿠데타 이후 정부를 장악한 하급 군 장교들로 구성된 위원회인 Derg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Derg의 의장직을 맡아 사실상 에티오피아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으며 1974년 11월 22일 쿠데타 이후 구금되어있던 황족들과 고위 관료들 61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 멩기스투는 에디오피아의 실권을 잡게되었다.

이후 1975년 8월 27일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를 살해한다.

 

하일레 셀라시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

 

멩기스투와 Derg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채택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로 알려진 급진적 사회주의 의제를 추구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에티오피아는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일당 국가 수립 등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붉은 공포

 

멩기스투 통치 기간 중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 하나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레드 테러' 캠페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반대파에 대한 잔인한 단속으로 수천 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살해되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이 시절 고문은 어린아이까지도 가리지 않아서 6세의 아이까지에게도 고문을 저질렀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내전

 

멩기스투 정부는 다양한 반군 단체, 특히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으로 알려진 연합의 일부인 티 그레이 인민해방전선(TPLF)의 무력 반대에 직면했다. 1970년대 중반에 시작된 에티오피아 내전은 광범위한 분쟁과 고통으로 가득찼고 수많은 사상자를 낳게되었다. 이 때 대기근이 발생하였는데 멩기스투 정부는 반란군을 막기위해 기근을 확대시켜 더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권력의 몰락

 

1980년대 후반, 멩기스투 정부는 국제적으로 점점 고립되어 갔고 반군 세력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반군은 계속해서 정부군을 상대고 승리하였고 1991년, EPRDF 군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자 멩기스투는 짐바브웨로 망명을 신청하며 에티오피아에서 도망친다.

짐바브웨 망명

 

멩기스투는 짐바브웨에서 수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다가 당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으로부터 망명 허가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처벌받지 않았으며 독재와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게 살고있다. 일부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저지른 인권 침해와 관련된 혐의에 대해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수용되지 않았다.

 

노년의 멩기스투(오른쪽)


유죄 판결

2006년,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법원에서 대량학살 및 기타 통치와 관련된 범죄로 부재중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에티오피아로 송환되어 형을 복역하지는 않았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독재시기는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 최악의 시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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