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중 활동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이자 초국가주의 조직인
우스타세 운동의 창시자인 발칸의 도살자 안테 바벨리치
어린 시절
안테 파벨리치는 1889년 7월 14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일부였던 브라디나 마을에서 태어났다. 자그레브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이후 프랑코푸치에 입당하며 정치를 시작한다.
우스타샤
파벨리치는 1930년대 초에 우스타샤 운동을 창설했다. 우스타샤는 파시즘과 가톨릭을 결합한 사이비 종교였으며 유고슬라비아와 분리된 크로아티아 독립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파시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혼합한 이념을 지지했다. 이 종교는 유대인과 세르비아인 수십만명을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다.
권력의 부상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절단했다. 이 분할 점령의 일환으로 파벨리치를 지도자로 하는 크로아티아 독립 국가(NDH)가 수립되었다. 파벨리치 정부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꼭두각시 정권이었다.
크로아티아의 정권
크로아티아의 파벨리치 정권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권위주의, 소수 집단, 특히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족에 대한 박해로 특징지어졌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십만의 사람들이 강제 수용소와 대량 학살에서 사망했다. 이때에 세르비아인 40만여명, 10만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치 독일과의 협력
파벨리치와 그의 정부는 나치 독일과 긴밀히 협력하여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에서 유대인과 세르비아인을 조직적으로 상당 부분을 추방하고 살해한 책임이 있다. 이후 추축국이 패배하자 축출되게 된다.
패배와 망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파벨리치와 그의 정권은 진격하는 연합군과 요십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당파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를 떠나 오스트리아를 통해 로마로 떠나며 망명길에 올랐다.
전후 생활과 최후
전쟁 후 파벨리치는 동정적인 정부와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전후에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서클에서 계속 활동했다.
안테 파벨리치는 1959년 12월 2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망명으로 인해 전쟁 범죄로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고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후안 페론의 고문으로 일생의 마지막을 지내었다.
안테 파벨리치의 평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크로아티아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여기는 반면, 다른 이들은 집권 기간 동안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를 저지른 전범으로 간주하는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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