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풍운의 시대, 새로운 하늘 아래
제8장: 붓끝에 맺힌 독(毒)
김약선의 계획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하게까지 들렸다. 최씨 군사 막부의 현직 장군을 사칭하여 서신을 위조하는 행위. 이것이 발각되는 날에는, 군량미 비리를 파헤치던 충신은 간데없고 정권을 전복하려 한 역도로 몰려 삼족이 멸해질 터였다.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진과 최민준은 김약선의 얼굴에서 어떤 망설임이나 두려움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결연했다.
"하겠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장혁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간결하게 말했다.
"오늘 밤 안으로, 문처립의 필체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다른 이들의 망설임도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기로 결심한 이상,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강화의 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왕궁과 고관들의 저택이 있는 곳은 삼엄한 경계 속에 적막이 흘렀지만, 군사들과 하급 관리들이 모이는 저잣거리의 뒷골목은 욕망과 취기로 소란스러웠다. 장혁은 어둠에 몸을 녹이며, 도방의 장교들이 즐겨 찾는다는 가장 큰 기루(妓樓) 근처의 허름한 주막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정보망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문처립은 주색과 투전을 광적으로 즐겼고, 특히 자신이 이긴 판돈을 기록해두고 나중에 하인들을 시켜 받아내는 것을 과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장혁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기록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기루의 회계를 보는 아전(衙前) 하나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장혁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인적이 드문 골목에 이르자, 장혁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전이 질겁하며 뒷걸음질 치자, 장혁은 품에서 묵직한 은자(銀子) 두 냥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문 장군께서 며칠 전 투전에서 쓰신 외상 장부를 잠깐 볼 일이 있네."
장혁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거절을 용납하지 않았다. 은자의 무게와 장혁의 기세에 눌린 아전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자신의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잠시 뒤, 장혁은 문처립이 직접 휘갈겨 쓴 '판돈 오십 관(貫)'이라는 글씨와 그의 서명이 담긴 작은 종잇조각을 품에 넣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김약선의 사랑채, 모든 문틈은 천으로 막혔고, 밖에는 장혁의 수하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방 안에는 김약선과 박진, 최민준 세 사람만이 타들어가는 촛불의 심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장혁이 돌아와 문처립의 필체가 담긴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박진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문장가였다. 그의 손에서 나온 글씨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지만,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예술의 정반대에 있는 기만과 위조였다.
"흠…."
박진은 종잇조각을 촛불 아래 비춰보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글씨에 힘은 있으나, 교양과 법도가 없구나. 획의 시작은 거칠고 끝은 오만방자하게 삐쳤으니, 딱 그놈의 성정을 닮았어. 붓을 제대로 배운 자의 글씨가 아니다. 힘으로 종이를 억누르는, 무뢰배의 글씨야."
그는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김약선과 최민준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의 손끝을 지켜보았다. 박진은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문처립의 거친 필체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일부러 붓을 거칠게 잡고 연습용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진 고유의 단아한 필체가 묻어 나왔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그의 글씨는 점점 더 거칠고 오만하게 변해갔다. 획은 제멋대로 춤을 췄고, 글자의 균형은 투박했다. 마침내 박진이 마지막 연습을 끝냈을 때, 종이 위에는 문처립의 것과 구별할 수 없는 '글' 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됐다."
박진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조익겸이 보낸 밀서와 똑같은 재질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김약선이 일러준 '독(毒)'이 담긴 문장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어리석은 놈. 너의 경거망동이 우리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다.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마라. 네놈의 일은 네놈이 알아서 처리해라. 만약 일이 잘못되어 네놈이 잡히게 된다면… 네놈의 처자식이라도 살리고 싶으면 어찌해야 할지 잘 알 것이다.’
마지막 '알 것이다'의 '다' 자에서, 박진은 일부러 붓끝에 힘을 주어 먹물이 방울처럼 맺히게 했다. 마치 냉혹한 마침표처럼.
완성된 위조 서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 문처립의 오만함과 냉혹함, 그리고 아랫사람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최씨 막부의 비정함이 글씨 너머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같은 날, 문처립의 저택.
문처립은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해서의 조익겸에게서 연락이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멍청한 놈, 설마 오는 길에 강도라도 만났나? 아니면 겁을 먹고 어디 숨어버린 건가?' 그는 조익겸의 서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최항에게 보고해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그때, 밖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최항이 예고도 없이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문처립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공자님, 어쩐 일로 누추한 곳까지…."
최항은 방 안을 쓱 둘러보며 비죽 웃었다. "듣자 하니, 진양공의 총애를 받는 부마 나리께서 곳간의 쥐새끼를 잡겠다며 온 나라를 뒤지고 다닌다지. 문 장군, 혹시 자네가 키우는 개가 너무 크게 짖어서 그 선비님 귀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문처립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최항은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제게 묶인 개들은 절대 주인을 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야지." 최항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알아서들 잘 처리해. 부마에게 빌미를 잡혀 이 형님을 귀찮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최항이 돌아간 뒤, 문처립은 더욱 초조해졌다. 그는 조익겸의 밀사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김약선의 사랑채. 위조된 서신은 조심스럽게 밀봉되었다. 장혁은 믿을 만한 상인으로 위장한 연락책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것을 조익겸에게 직접 전해야 한다. 원래 오기로 했던 밀사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오지 못했고, 자신이 대신 비밀 임무를 전달하게 되었다고 말해라."
연락책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들이 만든 '독'은 이제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김약선은 텅 빈 벼루를 바라보았다. 벼루에 남은 먹물 자국이 마치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보였다.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그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그들은 조익겸이라는 시한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그 폭발이 최씨 막부의 어느 곳까지 균열을 일으킬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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