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재자/유럽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

by 누사두아 2023. 11. 5.
반응형

히틀러의 비서이자 나치당의 비선실세로 군림했던 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마르틴 보어만

 

어린 시절과 권력의 부상

 

1900년 6월 17일 독일 베겔벤에서 태어난 마르틴 보르만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하지만 나치당으로 알려진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소속된 것이 그를 권력의 핵심으로 이끌게 된다. 1920년대 초에 당에 가입한 그는 변함없는 충성심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계급을 상승시켰다.

보르만의 급격한 상승세는 아돌프 히틀러의 눈에 띄어 그를 개인 비서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왕좌 뒤의 권력

히틀러의 개인 비서로서 보르만은 총통과 독보적인 접근 권한을 가졌고, 총통의 서신을 관리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정적인 역할이었지만 그가 나치당 내에서 행사한 막강한 영향력은 숨겨져 있었다. 1933년에는 당 서기장 직책을 맡아 히틀러의 문지기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보르만의 영향력은 서류 업무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치당 내 주요 회의와 행사를 조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나치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

보르만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나치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 홀로코스트 당시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기타 소수 집단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극악무도한 계획인 '최종 해결책'의 개발과 실행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보르만의 지문은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잔인한 박해부터

국영 언론 통제에 이르기까지 나치 정권의 다양한 측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 하였다.

 



마지막 날과 실종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보르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그는 전쟁 막바지에 히틀러와 다른 나치 고위 관리들이 피난처로 삼았던 베를린의 총통 벙커의 관리와 병참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연합군이 베를린을 점령하면서 보르만의 운명은 끝이 다가오게 되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마르틴 보르만은 실종된다. 그는 전쟁 범죄와 반인도 범죄 혐의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궐석 재판을 받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망 경위는 1972년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고 그해 베를린에서 건설 노동자들이 사람의 유해를 발견했고, 나중에 가족들을 통해 유전자 검사를 통해 보르만의 것으로 밝혀져 사망이 확실시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