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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범죄자

암흑가의 수상으로 불리운 마피아 프란체스코 카스틸리아

by 누사두아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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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마피아 럭키 루치아노의 후계자이자 루치아노 패밀리의 보스로 암흑가를 지배했던 마피아 

프란체스코 카스틸리아

프란체스코 카스틸리아

 

어린 시절

프랭크 코스텔로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카스틸리아는 1891년 1월 26일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라우로폴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4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뉴욕의 이스트할렘에 정착한 이후 거친 동네에서 자란

코스텔로는 어린 나이에 길거리 갱단과 범죄 활동에 연루되어 갱스터로 살게 되었다.

마피아의 부상

코스텔로의 범죄 경력은 금주법 시대에 더욱 발전했다. 그는 밀수 및 불법 도박의 세계에 뛰어들어 찰스 "럭키" 루치아노와 같은 주요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다.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마피아는 마약과 노동력 착취 등 다른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초점을 옮기게 되었고 마피아의 사업범위가 늘어나게 되었고 코스텔로가 활약하게 된다.

 

마피아 코스텔로


정치적 인맥

코스텔로를 돋보이게 한 것은 정치인 및 법 집행관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능력이었다. 그의 매력과 외교적 기술 덕분에 그는 원치 않는 관심을 피하면서 신중하게 사업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는 루치아노의 신뢰를 받는 동료가 되어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후 루치아노의 후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루치아노가 1946년,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쫒겨나자 루치아노 패밀리의 보스가 되었다.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다.

1957년, 코스텔로는 과거의 상급자 마피아였던 비토 제노베제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다.

비토 제노베제는 청부살인업자 빈센트 "더 친" 기가테에게 암살을 의뢰했고

코스텔로를 아파트 건물 로비에서 총으로 쏘게된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코스텔로는 머리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회복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마피아 세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영향력과 은퇴

코스텔로는 총격사건 이후 마피아의 직접적인 지도부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배후에서 조언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선호했다. 이를 통해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할 수 있었고,

더욱 신중한 마피아 두목으로 알려지게 되어 암흑가의 수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케포버 청문회

1951년, 코스텔로는 조직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 상원의 케포버 위원회에 출두했다. 청문회에서 그는 수정헌법 제5조를 들먹이며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코스텔로는 차분한 태도와 협조 거부로 대중의 동정을 얻었다.

청문회에서의 코스텔로


유죄 판결 및 투옥

1954년, 코스텔로는 연방 소득세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법적 문제에 직면했다.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1957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도 마피아 내에서 그의 영향력을 줄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노년의 코스텔로


말년과 죽음

석방된 후에도 코스텔로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을 유지했지만 막후에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후임 마피아 지도자들에게 조언을 제공했다. 1973년 2월 18일, 코스텔로는 맨해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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