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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남미

전쟁으로 몰락한 레오폴도 갈티에리

by 누사두아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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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도 포르투나토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군 장교출신의 독재자로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인물

레오폴도 갈티에리


어린 시절과 군 경력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1926년 7월 15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세로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병보직으로 군 경력을 쌓았고 결국 아르헨티나 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쿠데타에 참여하게된다.

그 후 1976년 이사벨 페론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권력을 얻게되었고 1981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포클랜드 전쟁

갈티에리가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순간을 맞이한 것은 1981~1982년 짧은 대통령 재임 기간 중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이끌고 영국과 포클랜드 전쟁(일명 말비나스 전쟁)에 참전했다. 이 분쟁은 주로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포클랜드 제도, 사우스 조지아,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의 주권을 둘러싼 것이었다.

대통령직 인수

1981년 12월 22일, 갈티에리가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로베르토 비올라의 뒤를 이어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를 통치했으며 집권 6개월만에 포클랜드 전쟁을 개전시켰다.

포클랜드 전쟁 결과

1982년 4월 2일에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같은 해 6월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났다. 영국군이 포클랜드 섬을 탈환했고, 이 패배는 갈티에리의 대통령직과 정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임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와 국내외의 압력 증가로 인해 갈티에리는 1982년 6월 17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후 갈티에리는 포클랜드 전쟁 중 자신의 행동과 아르헨티나 군이 저지른 인권 침해와 관련된 법적 소송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는 분쟁이나 인권 침해에 대한 자신의 역할로 유죄 판결을 받거나 투옥되지는 않았다.

이후의 삶

갈티에리는 정치 경력 이후 비교적 주목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대중의 눈에 띄지 않았고 크게 활동하지 않았으며 중요한 정치적 직책을 맡지 않았다.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췌장암을 앓다가 2003년 1월 12일 77세의 나이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망하게 된다.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주로 아르헨티나의 패배로 끝나고 아르헨티나의 정치 및 군사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친 포클랜드 전쟁에 관여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가 군부 통치 이후 보다 민주적인 정부 형태로 전환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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